물폭탄

묘한 날이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꽤나 많았다.

우선 아침에 늦잠을 자서 일곱시에 일어나는 바람에 까치관찰은 꽝이 될까 싶었는데, 비가 내릴듯 말듯 하면서 잘 참아 준 덕분에 그럭저럭 볼 수 있었다. 조금 일찍 끝낸 덕분에 열시쯤 아점도 잘 챙겨먹을 수 있었고. 요새는 별로 재미있는 이벤트가 일어나질 않아서 관찰이 지루하다. 58동 에어컨 둥지 아가들은 언제 독립하려나?

아점 먹고 열 시 조금 넘어서부터 네 시까지 스트레이트로 데이터 시트 변환하는 작업을 했다. 비디오를 보면서 만든 데이터 시트는 몇번 땅콩 몇분몇초에 어떤 멕시코 어치가 들었다 놓았고, 또 몇분몇초에 들었다 놓았고...... 하다가 마지막으로 몇분몇초에 어떤 어치가 들고 날아갔음 - 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걸 몇번 어치가 날아와서 몇분몇초에 어떤 땅콩을 들었다 놨고 또 언제 다른 걸 들었다 놨고.... 하다가 마지막으로 몇분몇초에 어떤 땅콩을 들고 날아갔다 - 라는 구조로 변환하는 일이다. 개체별로 하는 짓이 너무 다른 것 같아서 땅콩별로 데이터를 보아 봤자 쓸모가 없을 것 같아 이 짓을 하고 있는데, 수동으로 하려니 시간은 적잖이 걸린다. 매크로 쓰는 법이나 좀 배워 봐야지 이래가지고는.

요새는 은행이 네 시에 닫는지?  네 시 조금 넘어서 전기요금 내려고 농협을 가는데 문이 닫혀 있더라. 전기요금은 못 냈고, 점심 겸 저녁으로 먹은 김밥은 맛이 형편없었지만, 그렇게 학관을 돌아다니는 길에 1년 넘게 문경에 있는 정토수련원에서 행자수행을 하던 친구를 만났다. 엊그제 끝나서 집으로 돌아왔다나? 얼굴살이 조금 빠졌고, 편안해지지 않았나 싶다. 그 시간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과외 가면서 물폭탄을 맞아서 무릎 아래로 완전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상태가 되었는데 과외받는 꼬맹이 녀석은 비 오는 데 고생하셨다는 말은 고사하고 몇 분 일찍 왔다는 소리만 반복을 했다(그 방 시계가 5분쯤 느리더라). 역시나 꾸벅꾸벅 조는 애를 심지어 10분쯤 재우기까지 하면서 안 화내고 해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이건 정말 애가 머리가 나쁘고 노력을 안 하는 문제를 떠나서 인간이 덜 된 것 같아서 환멸이 느껴졌다. 두 시간을 떠드는데 물 한 잔 안 내오는 것이나, 그렇게 졸아대면서도 미안함 따위는 전혀 못 느끼는 아이의 태도도 그랬지만, 어찌어찌 과외를 끝내고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는데 애가 쪼르르 옷장 있는 데로 달려가더니 펼쳐놨던 걸로 짐작되는 만화책을 꺼내서 보고 있는 걸 보고는 진짜 두손두발 다 들어버렸다. 몇 분 일찍 왔다고 자꾸 그러던 이유도 알겠고, 잘 가라는 인사조차 안 하는 애한테 붙일 정 따위가 있을까 싶다. 그만두던지 해야지 원.

역시나 물폭탄을 맞으면서 집에 돌아와서 젖은 옷이며 가방을 정리하고 있자니 오늘 하루종일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들이 아귀를 맞추어 이어졌다. 군대에 있을 때도, 여기서 하루 종일 비디오를 보면서 데이터 정리를 하고 있어도, 내가 남들보다 잘 하는 게 똑똑한 머리와 창의적 발상이라기보다는 그냥 진득하게 지겹고 반복적인 걸 잘 참는 게 아닐까. 어차피 학생일 때조차도 먹고살기 위해서 공부 이외의 것들을 - 띠동갑 중학생에게 반쯤 하인 취급을 받아가면서 - 해야 하는 처지라면, 그냥 마음을 확 바꿔서 관료질을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왜, 또 좀 지내다 보면 국비로 공부도 시켜 주잖아. 커다란 조직에서 부품으로 사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하니까 - 누구나 싫어하잖아? - 그 쪽 적성이란 건 애초부터 좋아하는 거라기보다는 잘 견디는 걸로 수치화해야 할 것 같고. 어차피 적성도 열 번 하면 열 번 다 과학자가 아니라 공무원으로 나오는데.

요즘 같아서는 석사 끝날 때까지 유학 준비 말고도 다른 걸 조금 곁다리로 준비해 볼까 싶기도 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는 말, 전역하고 나니까 왜 이렇게 실감이 나지? 이게 다 그 망할 과외 때문이다. 똑똑하고 열심히 하려는 아이를 만났었다면 - 예전 과외들처럼 - 싫지 않았을 텐데. 후.....

그나저나 무선 인터넷이 안 잡혀서 랜선을 사다가 한참 잘 썼는데 목요일에 물폭탄이 터졌을 때부터 무선랜이 잘 잡히면서 유선랜이 연결이 안 된다. MyLG070 전화를 신청해서 왔는데, 이건 유선랜이 잡혀야 하잖아. 아.... 내일 오전에 집주인에게 전화를 해 봐야 하려나. 문고리 망가진 것도 같이 말해볼까.

아. 데이터 시트 변환이나 계속 해야겠다.

Posted by 충원

2009/07/17 22:40 2009/07/17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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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The Bridge>

5월 중이었을 게다.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아 학교에 오긴 왔는데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어서 이리저리 떠도느라 서점에 잠깐 갔었을 때 이 책을 진열대에서 처음 봤던 것 같다. <말벌 공장>이 상당히 인상이 강하게 남았던지라, 이 책 - 그리고 예의 그 인상적인 검은 표지 - 에 끌렸었다. 그 때는 여러가지로 소설책을 사서 읽을 상황은 아니었어서 그렇게 그냥 지나갔는데, 지난 달 초에 이 책을 전역 선물로 받았다. 읽기는 진작에 다 읽었는데 글을 쓸 시간이 없다 보니 선물해 주신 분께 죄송스럽게도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정말.]

열린책들에서 번역한 영국 작가 책이 이것이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인데(<미사고의 숲>이 영국 것인지 잘 기억이 안 나서) 이번 것도 마찬가지고 읽을 때마다 묘한 느낌이 든다. 꼭 좋은 것만은 아닌데 - <매혹>을 읽었을 때는 거의 욕에 가까운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 끌리는 느낌이다. 뭔가 "정상적인(그러니까 익숙한 소설들과 같은)" 이야기로 작정하고 써 내린 첫 1/3이 무색하게 (일부러) 엉망으로 섞어 버리는 이야기가 싫지만은 않은 건 이게 어디서 일어나는 일인가를 읽는 사람이 대충 알기 때문일까.

정말 오랜만에 책에 대해 글을 써 보려니 도대체 나오질 않는다. 쉽지 않은 플롯이라 아직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아서 더 그렇다. 끊임없이 교차하는 중층적 자아의 여러 단면 가운데 "야만인"은 도대체 무얼 상징하는 것이며 다른 이야기들과 어떻게 얽히는 것인지가 제일 궁금한데, 혹시 읽어보신 분 있으신지? 처음에 꿈에서 만났던 쇠도리깨질을 하는 곱사등이를 나중에는 현실에서 만나는 것 같은 묘한 전환이 일어나는데, 이게 내가 잘못 읽은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읽은 것인지? 그리고 주인공 이름에 대한 암시가 숨어 있다는데.... 뭔 헛소리야?

시간이 되면 뱅크스의 <말벌공장>과 프리스트의 <매혹>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싶다. 이 책도 다시 한 번 보고 싶고. 부분부분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솜씨가 두 명 다 대단하고, 그것을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가끔 "속았다"거나 "이자식이 정말!"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구조를 선보이기도 하지만 그게 또 시간이 한참 지나서 생각해 보면 묘하게 끌리는 수법이니까.

P.S. 이건 사족인데, 소설의 진행과는 전혀 상관없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사는 98쪽의 "엿 같이 굴지 마, 애비".

<다리 The Bridge>. 이언 뱅크스. 이예원 옮김. 2009. 열린책들. 11,800원.

Posted by 충원

2009/07/03 17:42 2009/07/03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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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g TIme No See.

여태껏 자취방에 PC가 없어서 근 한 달 동안 제대로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덩달아 소식도 전하지 못하여 본의 아니게 잠수탄 상태가 유지되었는데..... 잠수 하나 안 하나 사회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기는 한가? 하는 의문이 들기는 듭니다......

한 달 동안 꽤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 달 1일에 대학원 면접을 봤고 엊그제인 19일에 합격 발표가 났습니다. 어째 걱정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듯 싶습니다만, 4년 학교 다니고 3년 반을 떠나 있었던 준외인에게는 은근히 부담되는 일이었던지라 지금은 마음을 많이 놓았습니다. 편하네요, 붙어 놓으니까. 노비로의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Piotr 랩에서 일하는 것 또한 4주를 채웠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어요. 애리조나에 사는 멕시코 어치가 먹이 찾아먹는 실험 비디오를 보면서 비디오 자료를 수치 자료로 코딩하고 있는 것이 하나이고(Indoor work!), 교내 까치 관찰 기록과 크레인 작업 및 포획을 통한 개체식별작업이 다른 하나입니다(Outdoor work!). 3주차까지는 절반 이상을 아웃도어에 투자했으나, 이제 슬슬 시즌이 끝나감에 따라 인도어 쪽(본래 계약한 그 일!)의 비중을 높이고 있습니다. 비디오 보는 거 재미있기는 한데, 새한테 야바위 당한다는 것이 조금 기분상하고, 오래 보면 눈이 아파요. 하긴, 아웃도어에서 까치를 보는 건 오래 보면 쌍안경 때문에 목이 아프죠. 이래저래 정체성은 전형적인 블루칼라 쪽으로 형성되고 있습니다. 가을 되면 카고 바지와 청남방 하나 정도 살 지도. 그래도 꽤나 만족스럽습니다. 랩 분위기도 자유롭고 선생님도 열정적이시고요.

저번 주말과 이번 주말 모두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애인이 생기니 결혼식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됩니다. 역시 식당과 예식장은 분리를 해야 해요. 밥이 맛있고 넉넉하고 식사 자리는 편해야 하고요. 고등학교 동창 두 명이 일체형 예식장에서 결혼을 했는데, 이것 참 아니다 싶습니다. 주례는 길면 절대 안 되고(음... 그냥 이제부터 두 사람은 상대방과 자신이 r=1인 관계라 생각하고 사시오... 라고 주례해 주시는 분, 그걸 알아듣는 하객들 어디 없으려나요?) 분위기는 엄숙하고 우는 분위기도 안 되지만 폭소가 터지는 분위기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냥 식 내내 흐뭇하게 미소지을 수 있는 분위기가 좋아요. 이 정도가 그간 결혼식장 쫓아다니면서 얻은 교훈?

형이 예전에 전역한 직후가 정말 즐거웠고 일도 정말 잘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까맣게 타고 눈이 아플 정도로 일하고, 먹고 살 만큼 돈 벌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도무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갑니다. 자기 삶을 산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예요. 요새 사는 것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Posted by 충원

2009/06/21 19:15 2009/06/2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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